▶ 글 내 용

작성자
양철곤
게시일
2009-08-23 오후 4:56:24
제 목
희인 일가가 여러 차례 게시한 글에 대한 종합적인 소견
내 용
그동안 희인 일가가 무려 10여 차례에 걸쳐 게시판에 글을 올리며, 청주양씨와 중화양씨의 합보(合譜), 합관(合貫) 문제를 중심으로 한 우리 시조님의 관향(貫鄕)과 위상, 소원록(溯源錄) 내용, 일부의 자손록(子孫錄) 및 각 보서에 적힌 범례(凡例) 등에 관하여 잘못 기록된 부분 내지는 의문점 등을 지적하며 이에 대한 일가 분들의 의견을 듣고자하는데 대하여, 아무도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어 위의 내용들에 대하여 종합적인 본인의 소견을 적어봅니다.
우선 본인이 보기에는 희인 일가가 숲을 구성하는 한그루 한그루의 나무는 보면서도 전체의 숲은 잘 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문제점을 제기하며 의견을 듣고자하는 대부분의 내용들은 1987년도에 간행된 우리 청주양씨 대동보 권 1의 22쪽∼45쪽에 기록되어 있는 원류고(源流考)에 들어있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1570년(庚午)에, 7세손이신 봉래공(蓬萊公, 諱:士彦)께서 필사본(筆寫本)으로 만드신 우리 청주양씨 시보(始譜)와 그로부터 120년 뒤인 1690년(庚午)에 11세손인 헌석(憲奭) 선조께서 주관하여 간행한 것으로 알고 있는 2차보까지에는 당악군파(中和楊氏 系列)의 자손록은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1766년에 간행된 3次譜에 포(浦) 선조님을 기(起) 시조님의 6남으로 한 중화양씨 계열이 입보(入譜)된 사실에서부터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라 생각합니다. 본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좀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희인 일가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浦 先祖님이 실제로 起 始祖님의 6남이 아니었다면, 비록 일방적일지라고 어느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浦 선조님을 起 시조님의 계자(系子)로 하여 唐岳君 계열(중화양씨)의 후손들을 무리하게 入譜시켰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부분적인 사항을 논하기에 앞서 어느 쪽이 무슨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당악군 계열이 입보(入譜) 되었는지를 구명(究明)해보는 것이 우선되어야한다고 봅니다. 이에 대하여 본인은 入譜하게 된 커다란 동기는 다음의 두 가지라 봅니다.
첫째는 중화양씨 가문에는 1766년 우리 청주양씨 족보에 입보되기 전까지 내놓을만한 반듯한 족보를 보유하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반⋅상(班常)의 차별이 심했던 당시의 사회생활에 적응하는데 많은 불편을 느꼈으리라는 점이고,
둘째는 1601년(宣祖 34)과 1618년(光海君 11)의 수교문(受敎文)에 들어있는 바와 같이 황상(皇上)의 나라(中國을 지칭)에서 귀화하여 우리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분들의 후손에게는 영원토록 군역(軍役)이나 부역(賦役) 등을 면제토록 하라며, 첨언하여 충헌공과 경안공(휘 : 天震)의 세공 삭감에 대한 큰 공훈, 백연(伯淵) 장군이 운봉전투를 승전으로 이끈 전공, 퇴은공(諱 : 治)이 병사(兵使)로서 육진개척에 기여한 공로 등을 높이 평가하며 치하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에 중화양씨는 입보되기를 스스로 원했고, 청주양씨는 양씨하면 크게 보아 모두가 楊姓太始祖이신 백교(伯僑) 태시조님의 같은 자손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한편 그 세를 과시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난히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중화양씨가 자청하여 무리 없이 입보하였을 것이라고 확신되는 점은 1798년(戊午)에 간행된 中和楊氏 족보를 통해서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라 봅니다.
14세손인 경연(景淵, 당악군파)선조가 보서(譜序)를 쓰셨고, 또한 20세손인 수장(秀長, 당악군파)선조가 소서(小序)를 쓰신 중화양씨 족보에 들어있는 상당백(충헌공) 사적(上黨伯事蹟)과 그 子孫錄에서 浦 선조님을 起 시조님의 子로 한 자손록의 내용이 우리 청주양씨의 1766년도에 간행한 족보의 내용과 같습니다. 이 중화양씨 족보는 외부의 간섭 없이 중화양씨 스스로가 忠憲公(諱 起)을 시조로 하여 간행한 족보입니다. 이를 통해서 浦 선조임이 起 시조님의 실제의 子이었던, 혹은 子가 아닌데 系子로 하였던, 당시를 살아오신 중화양씨 모두가 이견 없이 충헌공을 시조로 하여 자손록에 등재하였다는 점에서 생각해 보면, 이제 와서 浦 선조님이 생년대로 보아 起 시조님보다 수 십년 앞선 분이니 증조부나 고조부발이 된다는 등의 표현은 자손들로서 망발이며, 선대의 조상들을 욕보이는 결과뿐이라 믿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할 때 희인 일가께서 지적한 합보, 합관이란 용어도 그렇고, 충헌공이 중화양씨네, 합보, 합관 등에 관한 범례가 부정확 하네, 소원록에 중화양씨란 말이 빠졌네 하는 등의 표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차제에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은 1969년도에 간행된 중화양씨 세보(中和楊氏 世譜)의 내용 문제입니다. 내용을 보면 우선 변의문(辨疑文)과 辨疑文續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방촌선생(厖村先生, 黃喜政丞)이 쓰신 충헌공 시조님의 행장이나 인적사항 등을 근본적으로 부정했음은 물론, 우리 족보상에 忠定王 3년으로 기록되어야할 곳이 忠宣王 3년으로 오기된 점을 들어 별이 별 내용을 갖다 대며 험담을 늘어놓았고, 또한 고려사에 진도의 적(賊)을 토벌했다고 나오는 양동무(楊東茂)라는 분의 년대를 인용하여 우리 시조님보다 數十年이나 앞선 분이 어떻게 족보상에 조손관계(祖孫關係)가 될 수 있느냐고 내세웠고, 자손록을 보면 이전에 발간된 족보(두 家門 모두의 족보)에는 어디에도 기록되어진 바가 없는 6세손 당악군파인 원석(元檡) 선조의 아들로 기(起)라는 가공인물을 등장시켜 놓고, 이분이 바로 우리 淸州楊氏의 始祖(諱 : 起)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이것을 근거로 하여 청주양씨는 중화양씨의 후손이 분파한 것이라는 말을 하며, 따라서 起 시조님이 浦 선조님의 5代孫이네, 또는 東茂 선조님의 현손(玄孫)이네 하는 등의 한심스러운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일 것은 대봉공 문집(大峰公文集) 내용인데, 희인 일가가 제시한 本文의 내용이나 유묵의 사진에 관한 내용은 맞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게시판에 제시한 原文의 해석을 달리하고 있는듯 합니다. 제시된 原文內容의 요점만을 들어 보면 "대광보국 도첨의 정승 起는 皇帝의 명을 받고 고려에 오셔서 淸州君(上黨伯)으로 봉해졌으며, 아들은 浦인데 정승과 용호상장군을 지냈고, 唐岳君으로 봉해졌다. 여기서 唐岳은 곧 中和인고로 자손들은 관향을 唐岳이라 쓰기보다는 오히려 中和라고 쓰고 있다"는 내용이라고 보여집나다.
이 글에서 보아 분명한 사실은 浦 선조님은 起 시조님의 아들이라는 점이고, 대봉공(諱 : 凞止)은 1400년대 후반을 사셨던 분이었기 때문에, 1766년에 간행된 청주양씨 족보에 중화양씨가 입보되기 이전의 사항임으로 당시의 관향인 中和(당악)를 썼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보이며, 따라서 자연발생적으로 당악 또는 중화양씨라 불려진 것이지 중화로 사관되어서 중화양씨라 부르게 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알듯합니다.
끝으로 본인은 희인 일가가 게시판에 많은 글을 올리고 듣고 싶어 하는 내용도, 앞서 말한 변의문(辨疑文)의 내용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되는데, 본인의 생각이 틀렸는지 요 ?
희인 일가는 위에 적은 1969년도 간행 중화양씨 보서를 잘 읽어 보았으리라 믿습니다. 중화양씨의 입보경위가 어떠했든 간에 우리는 충헌공(諱 : 起)이라는 한 분을 시조님으로 모시고 근 250년이란 긴 세월을 지내 왔읍니다.. 그러한 시조님을 두고,시조님의 행장 내용에서부터 신상문제, 공적사항, 위계문제 등 모두를 부정하여,시조님은 물론 많은 선조님들의 명예를 그 자손들이 실추시키는 그러한 행위가 있을 수 일인지 깊이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본인은 개인적인 의견으로 분명히 말합니다. 중화양씨가 청주양씨의 범위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신빙할만한 자료에 의한 시조되시는 분의 인적사항과 공적, 선 계열(父∼高祖父)의 인적사항, 가승보 및 관향(貫鄕)이 정해진 내력 등을 제시하고 우리는 이렇게 모두가 중화양씨로서 확실하니 청주양씨가 아니라는 것을 떳떳이 주장하고, 그동안 청주양씨에게 여러모로 많은 누를 끼친 점을 진지하게 사과 하고 나서 서로가 심중히 검토해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