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내 용

작성자
양철곤
게시일
2007-05-08 오후 3:08:45
제 목
대동보에 기재된 소원록 내용에 대한 고찰
내 용
대동보(大同譜)에 기재(記載)된
소원록(溯源錄) 내용에 대한 고찰(考察)

소원록을 보면 홍농 양씨(弘農楊氏)의 선대는 당 숙우(唐 叔虞)의 후손 백교(伯僑)가 진(晋)나라에서 주(周)나라로 오게 되어 周나라에서 양후(楊侯)로 봉하고 식채(食菜)케 한데서 楊氏 성을 삼았다고 하며, 다른 하나는 주 선왕(周 宣王)이 그의 아들 상보(尙父)를 楊侯로 봉한 데서,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晋나라 태부(太傅) 숙향(叔向)이 양씨에게서(“楊氏縣에서”를 잘못 기재한 것으로 간주) 食菜하였다 하여 그 땅을 평양 양씨현(平陽楊氏縣)이라 했고, 叔向이 백석(伯石)을 낳아 그 읍(邑)으로 姓을 삼아 楊石이라 한데서 楊氏의 성이 생겼다는 세 가지 설로 되어있다
그러나 중화 양씨 통보 편찬위원회(中華楊氏通譜編纂委員會)에서 연구 검토하여 발표한 양씨 원류 세계(楊氏源流世系) 내용에 따르면 적조(嫡祖:정통 조상) 伯僑는 진 무공(晋 武公)의 아들이라는 점과, 周나라 리왕(釐王) 3년에 武公이 晋의 난을 평정하고 晋나라를 통일하여 周 왕실에서는 武公을 晋侯에 봉하고 그 땅을 내렸다고 하였으며, 伯僑는 周에 귀화(歸化)하여 楊侯에 봉해졌으며 식읍으로 고양국(古楊國: 전에 尙父 建이 봉해졌던 곳)을 받아 조세를 받게 되고 楊이란 성을 하사(下賜) 받아 楊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소원록의 내용이나 中華楊氏 源流世系의 내용이 일치되어야함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따라서 본 고찰에서는 두 내용상의 차이점을 찾아 확인해 보고 의문점을 풀어보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 소원록의 내용을 보면
첫째 : 弘農 楊氏 先代의 世系관계를 잘 알고 있지 못한데서 세 가지의 설(說)로 나뉘어졌다는 점.
둘째 : 周의 제후국으로 楊나라 또는 고양국(古楊國) 등이 있어 이들 나라에 봉했던 제후를 楊候라 불렀는데, 이 楊字가 우리 姓과 같은 글자라서 楊씨의 성을 가진 사람이 제후로 봉해졌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楊侯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을 楊으로 삼게 된 것으로 믿어지게 되었다는 점.
셋째 : 周나라 역대 王의 성은 희씨(姬氏)였는데 姬氏인 왕족이 성을 바꾸려면 왕의 명령이나 하사받음이 없이 스스로 자신이나 가족의 성을 바꿀 수는 없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제후나 태부(太傅)의 지위에 있으면 자유롭게 성을 정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온 점 등에서 세 가지 說이 나오게 된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예를 들면 伯僑는 막연히 唐叔虞의 후손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 점, 周 宣王이 그의 아들 상보(尙父)를 楊侯로 봉했다는 내용만 들어있을 뿐 그 외 尙父에 관한 後代의 世系關係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 그리고 晋나라 태부(太傅) 叔向에 관하여도 그 앞의 世系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唐叔虞나 伯僑와의 관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 등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차이점이나 의문점들을 살펴보기 위하여 우선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인적배경(人的背景)을 순차적으로 여러 문헌을 통해서 알아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唐叔虞는 무왕(武王) 발(發)이 周나라를 세운(B.C. 1123) 뒤 그의 셋째 아들인 叔虞를 唐에 봉했던 관계로 唐叔虞라 부르게 된 것으로 B.C. 1,100년경의 인물이다.
伯僑는 晋 武公인 칭(稱)의 둘째 아들로 唐叔虞의 13世孫이 됨은 중화 양씨 源流 世系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되어지는 사항이다.
다음 周 宣王이 그의 아들 尙父를 楊侯로 봉했다는 尙父는 唐叔虞와의 관계라든가 또는 그의 後 世系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으며, 다만 伯僑가 楊侯로 봉해져 식읍(食邑)으로 지정받은 古楊國에 전임 楊侯로 尙父 建이 봉해졌었다는 사실만이 중화 양씨 원류 세계에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伯僑가 周 武王의 셋째 아들인 唐叔虞의 13世孫이라는 점과 尙父가 周 宣王(B.C. ?∼B.C. 782)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연대를 비교해 보면 같은 왕족의 신분으로서 거의 같은 시대의 인물이었다는 점만 이해될 뿐이다.
그 다음 晋나라 태부(太傅)로서 楊氏縣에서 식채하고, 아들 백석(伯石)을 낳아 그 읍(邑)으로 姓을 삼아 楊石이라 불렀다는 叔向은 우리 소원록에는 역시 그 先代의 世系 모두가 빠져있을 뿐만 아니라 그 後代의 世系에 있어서도 石(伯石)부터 장(章)까지 사이에 무려 10代의 世系가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中華 楊氏 源流 世系에는 叔向의 先・後代 世系가 분명하여 唐叔虞로부터 중시조(中始祖)라 부르는 진(震) 先祖까지의 世系가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들어나 있다. 따라서 叔向은 伯僑의 玄孫이며, 직(職)의 5男中 2男으로 휘(諱)는 숙비(叔肹)이고 字가 叔向이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어진다. 그러므로 叔向은 唐叔虞의 16대 직계 손이었음도 알 수 있다.
앞서 서술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周 宣王이 그의 아들 尙父(建)를제후국(諸侯國)인 古楊國의 諸侯로 봉한 데서 楊氏의 성을 갖게 되었다는 설(說)은 그 後 世孫의 연결 관계나 성을 하사받았다는 내용이 명확하지 않은 점 등으로 보아 믿어지지 않는 내용이라 해석 된다
古楊國이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주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周 宣王의 생존기간으로 보아 기원전 770여 년 전의 일이 됨으로 古楊國이라는 제후국의 명칭은 그 전에 이미 주어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다만 尙父 다음에 바로 伯僑가 楊侯로 봉해지면서 食邑으로 古楊國을 하사(下賜) 받고 또한 姓氏를 楊으로 하사받았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비슷하여 후손들이 이를 혼동한데서 온 결과라 생각되며, 한편 尙父가 처음 姓을 楊으로 삼았다면 최소 그 몇 代의 世孫만이라도 알려져 있어야 했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이 說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또한 晋나라 太傅 叔向이 楊氏縣에서 食菜하며 伯石을 낳아 그 邑으로 姓을 삼아 楊石이라 한데서 楊氏의 姓을 갖게 되었다는 설(說)에 대해서도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우선 우리가 공손황제(公孫黃帝)의 후손이라고 하는 점을 역사적으로 더듬어 보면, 黃帝의 姓氏가 公孫이었기 때문에 公孫黃帝라 호칭하나, 黃帝가 희수(姬水)에 사셨기 때문에 姓 을 姬로 고쳤던 관계로 姬氏로 전해 오고 있으며, 周나라 王의 姓氏가 姬氏이며, 따라서 王族의 지손(支孫)들이었던 唐叔虞, 伯僑, 尙父(建) 및 叔向 등 모두가 당초에는 姬氏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 중 누군가가 楊이라는 성을 하사받고부터 그 후손들에게 楊이라는 姓이 이어져 왔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가운데 叔向은 中華 楊氏 源流 世系表에 의하면 伯橋의 현손(玄孫)으로 이미 楊氏의 姓을 가진 신분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公孫黃帝의 후손(後孫)라고 하는 까닭은 앞서 적은 세분 중 어느 분이 홍농 양씨의 적조(嫡祖)이든 모두 희씨(姬氏)에서 楊氏의 姓을 하사받아 楊氏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만약 叔向이 姬氏가 아닌 상태(이는 周 王室의 支孫이 아니었던 신분을 의미함)에서 그의 아들 伯石에게 邑의 이름으로 姓을 삼아 楊石이라 부른데서 楊氏의 姓이 시작되었다면 弘農 楊氏는 公孫黃帝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귀결(歸結)된다.
또한 晋나라의 太傅 叔向이 주 왕실의 지손으로 姬氏였었다면 별도의 姓을 갖는데 皇帝로부터 姓을 하사(下賜)받지 않고, 임의로 姓을 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며, 또한 객관적으로 보아도 姓을 정하는데 있어 자신을 제외하고 아들에게만 姓을 개인적으로 부여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점이다.
이상과 같이 소원록 내용을 고찰해 본 결과
弘農 楊氏가 楊氏의 姓을 처음 갖게 된 세 가지 說 가운데
1. 周 宣王이 그의 아들 尙父를 양후로 봉한 데서 양씨의 성을 갖게 되었다는 설은 근거가 될 만한 아무런 자료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후대 世系를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신빙성이 없다고 보며,
2. 晋나라 太傅 叔向이 楊氏縣에서 식채하며 아들 伯石을 낳아 그 邑으로 姓을 삼아 楊石이라 한데서 楊氏의 姓이 시작되었다는 설은, 숙향이 백교의 현손(玄孫)임이 중화 양씨 원류 世系表를 통해서 분명히 확인되어지고, 또한 왕족의 지손으로서 왕의 명령이나 하사받음이 없이는 姓을 임의로 새로이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이 說 또한 신빙성이 전혀 없다고 본다.
3. 당 숙우의 후손인 백교가 주나라로 귀화하여 주나라에서 양후로 봉하고, 식채하게 한데서 양씨 성을 삼았다는 설은
이 내용에서 당숙우와 백교 사이의 世系관계, 백교를 주나라에서 특별히 우대할만한 사유 및 양씨로 성을 삼게 된 동기 등만 확실하다면 정설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내용이라 본다.
이에 보완될 내용들은 中華 楊氏 源流世系에 이미 다음과 같이 정확히 밝혀져 있다. 즉 백교는 당 숙우의 13세손이며, 백교의 선친인 진무공(稱:칭)이 진의 난을 평정하여 진나라를 통일한 공로로 周나라에서는 晋武公을 진후(晋侯)로 봉한데 이어 伯橋가 자진하여 周로 귀화하게 된 점 및 양씨의 성을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고 하사받았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설이라 결론지으며, 앞으로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서 더욱 연구 검토하여 우리 대동보를 다시 만들 때에는 소원록의 내용이 보다 충실하게 되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先祖님의 尊稱이 모두 省略되었음을 諒解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첨부: 中華楊氏源流世系(번역문)


22世孫 澈 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