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내 용

작성자
양철곤
게시일
2009-08-13 오후 8:48:50
제 목
양영흥 일가의 글에 대한 답변
내 용
답하기에 앞서 영흥 일가님은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라서 어느파 몇세손이시고 어디에 사시는 일가인지가 궁금하군요? 그리고 황의돈 박사가 지적했다는 내용에 관한 진위여부를 떠나서 이러한 사항은 우리 청주양씨 모두의 대외적인 체면이나 위상에도 크게 관계되는 사항이니 만큼 가급적이면 전화나 또는 대종회 사무실로 찾아와서 검토해 보거나 토론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글을 읽어본 뒤 바로 일가가 올린 글을 지워주었으면합니다.
황의돈 박사가 위작이라고 밝혔다는 글의 표현이 어떻안 수준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본인도 방촌선생문집 부편에 실려 있는 상당백충헌공암곡양공행장(현재 대종회 사무실에 비치되어 있음)을 읽어보았어요. 우선 방촌선생 문집을 편집한 사람는 "예전에 간행한 실기를 상고하면 이 이하부터는 모두 원편에 있는데 문의와 연대를 세밀히 상고하면 사실과 틀리는 것이 있어 이를 이작하여 우선 부편에 올린다"라고 첨언해 놓은 부분이 았어요. 아마 이러한 내용을 확대해석하여 위작이란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이는 충헌공행장을 본인이 읽어보아도 뚜렸하게 잘못된 부분이 3군데나 있다고 생각되어요. 첫째는 우리 시조님께서 노국공주를 모시고 우리나라에 오신 년대가 "충정왕 3년"이라고 표기되어야 할 것이 "충선왕 3년"으로 표기되어 무려 40년의 차이가 나고, 둘째는 세공을 삭감하기 위하여 주청사로 활동하신 년대가 "지정(원나라 순제때의 년호) 말년"이라고 표기되어야 할 것이 홍무(명나라 주원장 시의 년호) 말년으로 표기되어 약 25년간의 차이가 날뿐만 아니라 우리 시조님께서 세공 삭감을 위하여 중국에 들어가셔서 황제와 대화하신 기록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과거 오랜기간 신하로 근무했던 군신지간의 사이가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대화내용들로 원나라 순제하고 밖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내용이 분명한데, 이를 홍무 말년이라고 표기하여 마치 명나라 주원장시기(1386년)로 표현한 점. 셋째 행장 말미에 3세이신 백연 선조님의 운봉전투 승전비 건인데, 나라에서 인정하여 세운 승전비는 선조왕(1576년) 때인데, 그보다 130 여년 전에 작고한 방촌선생이 어떻게 앞날의 일을 내다보고 운봉전투의 승전비건을 충헌공의 행장에 기록할 수 있느냐는 점인데, 이는 운봉전투가 끝난 뒤 임시로 참전용사들이 승전의 기념표시를 하여둔 것을 200여년 뒤에 나라에서 정식으로 승전비를 해 세울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이러한 3가지 년대가 잘 맞지않는 내용만으로도 역사학자들은 쉽게 위작일 가능성이 있다고 단정하여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후손된 우리는 좀더 시야를 넓혀 당시대를 같이 살며 고위관직(정승)을 역임하신 분들이 남겨 놓으신 행장 발문(조준 영의정), 화상찬(정탁 우의정), 수증사 봉안문(하륜 영의정), 춘추향사 축문(남재 좌의정) 등을 자세히 살펴 보고, 이 모두가 거짓이었겠는가를 냉철히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