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내 용

작성자
양훈직
게시일
2009-08-27 오후 11:12:03
제 목
희인 일가님께
내 용

우선 게시판을 통해서 훌륭한 일가님을 알 수 있게 되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난번 제가 말씀드린 내용, 즉 壬戌譜의 年代라든가 崇禎後四辛亥 등에 대하여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玄孫이란 말에는 말씀이 없으시더군요.
이제 지난번 여러 차례에 걸쳐 일가어른께서 올리신 글과 그에 대하여 철곤 일가님께서 종합적인 소견이라는 제목으로 오린 글에 대하여, 일가어른께서 “저는 분명 合譜라했는데 合貫은 분명히 다르다 함이며 이의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하며, 본인이 올린 글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였는가 봅니다.” 라고 하신데 대하여 제가 두 분의 글을 보고 느낀 바를 말씀드리며, 제 의견도 차제에 말씀 드려볼까 합니다. 행여 잘못된 점이 있으면 널리 이해하여 주시고 고치도록 책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일가어른께서 合譜라는 용어는 여러 번 쓰셨고, 合貫이라 말은 8월 15일자 “청주양씨 보서의 범례”라는 題目 下에 淸州楊氏 丁卯譜(1807) 凡例와 淸州楊氏 丁酉譜(1957) 凡例를 들면서 처음 나온 용어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철곤 일가께서는 희인 일가님이 10여 차례에 걸쳐 올리신 글에 대하여 종합적인 소견이라는 글에서 우리 淸州楊氏 족보의 來歷을 들면서 合譜는 入譜라는 의미일 뿐이고, 合貫이란 一家 間에 체면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섰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본즉 정당한 합보란, 한 할아버지 자손이 특수한 사정에 의하여 흩어져서 살게 되어 서로 소통이 안 되는 상태에서, 서로 시조님을 달리한(예 ; 서원백, 정승공, 전서공, 서평군, 밀성군, 당악군 등) 족보를 만들어 모셔오다가, 모두가 시조님이 忠憲公(諱:起)이라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 忠獻公을 시조로 한 족보가 만들어졌을 때 合譜이지, 다섯 분 2世의 자손들은 모두 충헌공을 시조님으로 한 족보를 모시고 있었는데, 數 百年 뒤에 한 子孫의 계열이 나타나 그 족보의 子孫錄에 끼어 들어오는 것이 무슨 合譜냐는 뜻이지 요 ? 저도 철곤님의 이 마씀에는 同意합니다. 그런데 다행이도 희인 일가어른께서 중화양씨에 壬申譜(1632年)와 壬戌譜(年代 未詳)를 갖고 계시다니, 매우 중요한 자료를 찾은 것 같습니다. 잊지 마시고 종친회 사무실에 사본을 한 부씩 만들어 제시해 주시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풀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될듯합니다. 그리고 合貫이란 用語는 더욱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일조지손(一祖之孫)이라면 당연히 始祖님이 하사(下賜) 받으신 관향(貫鄕)이든, 아니면 달리 정해진 관향이든 하나일 뿐이고, 그 외 中和, 唐岳, 安岳, 密陽 등은 훌륭히 된 後孫들에게 봉해진 관작(官爵)에 따른 地名이거나,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살아온 地名에 근거하여 부른데서 유래된 관향이라 생각되며, 이들은 모두 他姓氏들이 中和에 사는 楊씨를 부를 때는 中和楊氏라 호칭하겠지만, 우리 楊씨 일가들끼리는 中和派 또는 唐岳君派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생각해 본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中和楊氏가 아니고 中和派 또는 唐岳君派라고 부를 수밖에 없음은, 희인 일가 어른께서는 8月 18日자로 제시한 글에 大峯公(諱 : 凞止)文集에 들어있는 대봉공 行狀中의 一部(大匡輔國都僉議政丞起受帝命始來東封淸州君有子曰浦政丞龍虎上將軍封唐岳君唐岳卽中和故子孫仍以中和爲貫焉子曰東茂---)를 소개하며, 대봉공이 中和楊氏 이었음을 분명히 알리고자 하신 것 같은데, 이 글에서 더 주목을 끄는 것은, 浦 선조님이 起 시조님의 아들이라고 명시된 점이라 보입니다. 미쳐 그 점은 생각을 들 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丙戌譜(1766년 간행)인 淸州楊氏 族譜에 入譜된 자손록 내용도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30년 뒤인 1796년인가에 간행되었다는 中和楊氏族譜를 보아도, 始祖로 모신 상당백사적(上黨伯事蹟)의 내용이나 자손록 등에 浦 선조님은 忠憲公(諱:起) 시조님의 아들(子)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지고 있어 自他가 공인하고 있는 터인데, 더 이상 무슨 족보의 범례에 合譜니, 合貫이니 하는 부질없는 말이 필요한가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없다고 철곤 일가 분은 분명히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지난 8月 24日자 게시문에 唐岳君 20代孫 병효(秉孝) 선조께서 쓰신 신해보(辛亥譜, 1851년 간행)의 譜序를 소개하셨는데, 내용은 잘 모르겠으나, 제가 보기에는 唐岳君(중화양씨) 계열이 1700년대 당시의 사회적 여건이나 나라에서 주는 여러 가지 혜택을 고려하여 1766년에 淸州楊氏 족보에 入譜하여 놓고, 중화양씨는 다른 생각을 가지셨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1766년의 淸州楊氏 족보에 입보 된지 약 30년 뒤인 1796년에 中和楊氏 族譜라는 이름으로 수보를 하였는데, 정상적으로 이름을 붙였다면 中和楊氏(혹응 당악군) 派譜라고 했어야 맞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 또한 1851년에 만든 신해보(辛亥譜)의 譜序도 제가 보기에는 中和楊氏 派譜가 아니고 中和楊氏 族譜라는 이름의 名分을 찾아 만들기 위하여 浦 선조님은 高麗史를 보니 충헌공(諱 : 起) 시조님 보다 시대적으로 120여년 앞선 분이니 충헌공을 시조님으로 모실 수 없다는 내용 즉 중화양씨는 따로 시조님을 모실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담은 명분을 쌓기 위한 글이었다고 보여 집니다.
결국 이 내용은 1969년도에 발간한 중화양씨 족보에까지 이어져, 변의문(辨疑文)과 변의문속(辨疑文續)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방촌선생(庬村先生 : 黃喜 政丞)이 쓰신 우리 시조님의 행장을 위작이라 밀어붙이고, 우리 始祖님의 빛나는 업적을 부정하며 헐뜯고, 그것도 모자라 우리 시조님이 浦 선조님의 몇 代 後孫이라느니 하는 데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라 믿어집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결론적인 말씀은
첫째는 1766년도에 간행된 청주양씨 족보에 당악군파로 입보된 중화양씨 후손들이 자의(自意)에 의해서 입보한 것인지 ? 아니면 타의(他意)에 의하여 강제로 입보된 것인지 하는 문제가 가려져야 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1,400년대 후반을 사셨고, 또한 당악군파 뿐만 아니라 우리 청주양문의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 대봉공의 문집에 있는 대봉공 행장이나, 1796에 간행된 중화양씨 족보에도 분명하게 시조님으로 모셨던 분을, 그 행장에서부터 신상에 관한 모든 문제를 깡그리 부정하며, 모독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점이고,
셋째는 다른 청주양씨들은 모르게 1796년에 만든 중화양씨 족보를 중화양씨 파보라 하지 않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1851년도에 만들었다는 중화양씨 족보의 보서 내용이나, 1969년도에 제작한 중화양씨 족보의 변의문 내용에 이르기까지, 상통하는 점을 보면, 손쉽게 청주양씨 족보의 자손록에 넣어서 이로운 점은 취해가면서 우리는 唐岳君派가 아니고, 中和楊氏라 자처해 온 표리(表裏)가 不同한 일을 하여온 것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짚어볼 문제입니다.
넷째는 浦 선조님이 우리 시조님(諱 : 起)의 아드님이 아니라고 否定하고 싶으면, 그 분의 生父와 先系(조부, 증조부 등)를 신뢰할만한 자료에서 찾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